“대수야, 자?”
“아니.”
“돈 버는 거 힘들지?”
“응.”
“엄마 아빠 안 보고 싶어?”
“여기보다 먼 기숙사서도 살았는데 뭘……”
“우리, 돈 모아서 얼른 독립하자.”
“응.”
“남들 공부할 때 빨리빨리 애 키워서, 남들 일할 땐 효도받으면서 놀자.”
“아싸.”
“대수야, 자?”
“아니.”
“넌 애가 어떤 애였으면 좋겠어?”
“음…… 남자아이?”
“아니, 그런 거 말고. 성격이나 장래희망 같은 거 말이야.”
아버지는 잠시 머뭇댔다. 보호자인 본인도 아직 뭐가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런 바람을 가져도 되는지, 그럴 자격은 있는지 자신할 수 없어서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자신에게 하고 싶은 얘기를 했다.
“어…… 나는, 애가 꿈이 있는 아이였음 좋겠어. 너는?”
어머니가 서글서글한 눈망울에 기대를 한껀 담아 말했다.
“음…… 나는 얘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아이였으면 좋겠어.”
아버지가 피식 웃으며 어머니를 나무랐다.
“야, 그거 쉬운 일 아니다.”
어머니도 지지 않고 대꾸했다.
“왜? 아기들한테는 그것만큼 쉬운 일이 없을걸?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만들면 되잖아.”
아버지는 여전히 ‘아내’라기보다는 ‘여자친구’처럼 느껴지는 어머니를 향해 모로 누웠다. 그러곤 어머니의 배를 어루만지며 그늘진 얼굴로 속삭였다.
“얘가 우릴 좋아할까?”
어머니가 아버지의 손등 위에 자기 손을 포갰다.
“글쎄……”
“얘가 원하는 걸 우리가 다 해줄 수 있을까?”
“그러게……”
두 사람은 한동안 컴컴한 허공을 바라봤다. 창밖에선 서서 잠든 나무들이 짙은 한숨을 토해내고, 마당 앞 키 큰 작물들은 바람의 방향에 따라 머리채를 흔들며 산이 꾸는 꿈을 곁눈질하고 있었다. 싸구려 벽지가 발라진 시멘트 벽 너머로 옆방 사내의 코 고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잠시 후, 아버지가 말했다.
“생각해보니까 말이야.”
“응.”
“뭘 잘하지 않아도 좋으니까 말이야.”
“응.”
“건강하기만 했으면 좋겠다.”
어머니는 잠시 눈을 굴렸다. 그러곤 너무 차분해서 어딘가 슬프게 들리기까지 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그거면 되겠다.”
【이후 줄거리】
시간이 점차 흐르며,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두 사람을 찌푸린 눈으로 바라보던 사람들도 이제는 한마디씩 말참견(덕담)을 하며 축복과 관심을 보낸다. 단짝 한수미의 주도로 어머니의 동급생들이 앙증맞은 신발 한 켤레를 들고 찾아와 축하하며 이야기꽃을 피운다. 친구들과 작별할 때 어머니는 오늘따라 친구들이 유난히 친절했음을 느끼고, 그것이 미안함(이제 자주 보러 오지 못하리라는)에서 깃든 친절이었음을 깨닫는다.
팔삭둥이 조산아답지 않게 우렁찬 울음소리를 내며 ‘나’는 태어난다. 출산 직후 ‘나’를 보며 어머니는 총체적인 감정의 울음을 터뜨린다. 외가식구들은 아들이라는 기쁨에 울며 얼싸안고, 아버지는 그동안 남몰래 ‘아버지가 되지 않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한 게 미안해, 남들보다 두 배 세 배 더 크게 울어 간호사들의 빈축을 산다.
2
열입곱 살의 ‘나’는 조로증으로 이미 신체가 팔십 세의 그것과 같은 상태이다. 하루는 ‘나’의 증세를 빌미 삼아 포교활동을 하러 온 사람들을 문전박대한 후 괜스레 울적해진 아버지가 잔뜩 취해 만두꾸러미를 들고 집으로 돌아와 ‘나’와 이야기를 나눈다. “제가 뭘 해드리면 좋을까요?”라는 ‘나’의 질문에, 아버지는 미안해하지 말기를 당부하며, “네가 나의 슬픔이라 기쁘다, 나는”이라고 답한다.
‘나’는 열일곱 생일선물로 병실에서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한 노트북을 선물 받는다. ‘나’는 병실에서 보내는 대부분의 시간을 다양한 책을 읽으며 보냈다. 독서 경험을 어머니와, 아버지와, 이웃에 사는 철부지 장씨 할아버지와 나누기도 했다. 그리고 이제는 자신도 무언가를 본격적으로 쓰고 싶다는 욕구에 노트북을 바랐다. 이 욕구는 중환자실에서 사경을 헤매다가 중간중간 의식이 돌아왔을 때 가족 친지들이 나누는 이야기(그들 또는 ‘나’와 관련된 여러 단서)를 듣게 되면서 싹튼 것이었다. ‘나’는 자신이 겪은 것과 들은 것 등을 한데 그러모아 머릿속에 수많은 이야기를 영상처럼 떠올려보다가 의식을 되찾았고, 중환자실을 나온 후 생일에 받고 싶은 선물로 노트북을 말했던 것이었다.
3
어머니와 아버지는 많은 것을 새롭게 배워가며 ‘나’를 키운다. 뒤집기 하나에 가슴 벅차하기도 하고, 수면부족으로 고단해하기도 하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밋밋했던 단칸방 신혼살림은 원색의 유아용품으로 가득 차 가고, 아기 키우는 집이면 으레 나는 다양한 냄새들로 꽉 찬 느낌이 된다.
막상 손자를 보자 마음이 좋아진 외할아버지는 아버지에게 가게를 내주겠다고 한다. 대호관광단지 유치 때 받은 보상금이 있어서 가능했다. 아기 울음소리에 이웃 세입자들과 벽간소음 문제로 불화도 커져가고, 잇따라 건설현장에서의 사고도 접하던 터라 안 그래도 새로이 터전을 잡을 필요가 있었다. 아버지는 궁리 끝에 스포츠용품점(나이키)을 내기로 한다.
‘나’는 하루가 다르게 자라며 예쁨을 한껏 받는다. 돌이 지나고 반년 후, 처음으로 “엄마”를 말해 모두의 이후 “엄마 이건 뭐야?”를 하루에도 몇 번씩 반복하며 집안일로 피곤한 어머니를 계속 못살게 굴기도 한다. 백일에는 수수떡을, 돌 때는 명주실을 잡은 ‘나’는 잘 먹고 잘 싸고 적당히 넘어지고 다치며 무럭무럭 자란다. “엄마”를 처음 말했을 때 기뻐 박수갈채를 보내준 부모님과 외가 친척들의 애정과 관심 속에서.
4
여느 때와 같은 하루, 열일곱의 ‘나’는 조로한 몸으로 노트북으로 비밀스럽게 글을 쓰고 있다. 그러다 어머니의 인기척 황급히 화면을 숨긴다. 악몽(물에 빠진 ‘나’를 건지지 못하는 내용)에 잠을 이루지 못한 어머니를 안심시킨다. 어머니를 돌려보낸 후, 나는 ‘사람들은 왜 아이를 낳을까’라는 질문에 답을 찾느라 한참을 궁리한다. 그리고 이어 부모님의 젊었을 때 사진을 보고 느낀 점을 적으며 ‘부모는 왜 아무리 어려도 부모의 얼굴을 가질까?’를 사색한다. 아흔 연세의 아버지에게 늘 꾸중을 듣는 예순의 철부지 장 씨 할아버지와 대화를 나누고는 ‘자식은 왜 아무리 늙어도 자식의 얼굴을 가질까?’도 사색한다. 그러고 나서 첫 질문(‘사람들은 왜 아이를 낳을까?’)의 답을 낸다. ‘자기가 기억하지 못하는 생을 다시 살고 싶어서.’라고. 하지만 ‘하느님은 왜 나를 만드셨을까?’라는 질문의 답은 아직 찾지 못한다.
5
스포츠용품점은 이 고장에서 나름대로 번화한 곳인 시장 지역에다 연다. 터전도 여기에 잡는다. 어머니는 종종 외할머니에게 ‘나’를 맡기고 가게에 들르기도 하고 단짝인 한수미를 만나 수다를 떨기도 한다. 하루는 한수미가 어머니에게 물었다. 아버지의 어디가 마음에 좋았냐고. 어머니는 “되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없다”며 ‘꿈이 없는 척’하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자신의 내면과 비슷함을 느껴 좋아하게 되었다고 담담히 털어놓는다. 일상이 된 구타에 진저리가 나 항상 학교에 가기 싫어하던 아버지가, 하루는 대회 심판에게 대든 탓에 선배들로부터 아주 심하게 구타를 당했다. 그날 절뚝이며 기숙사에 돌아와 방문을 열었을 때, 자위를 하던 룸메이트(조금 모자라지만 달리기를 무척 잘해 체고에 부모가 진학시켰고, 학교생활에서 아버지를 많이 따르던)를 보고 갑자기 이유 모를 화가 치밀어 올라 룸메이트를 미친 듯이 팼고, 이후 아버지는 울먹이며 학교에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말과 함께 이 일들을 어머니에게 털어놓았고, 그날 아버지가 잤음을 어머니는 단짝에게 이야기 하게 된다.
6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귀찮으리만치 두 분의 이야기를 캐묻는다. 글쓰기를 위해서이다. 아버지에게 되고 싶었던 것을 묻기도 하고, 어머니에게 ‘어떻게 저를 만들 생각을 했는지’를 묻기도 하고, 아버지가 첫사랑이었는지 묻기도 한다. 어머니는 주춤하다 첫사랑이었다고 답하며 성가신 듯 ‘나’를 물리친다. 아귀가 잘 안 맞기도 하는 어머니와 아버지 이야기를 열심히 조합하며 ‘나’는 두 사람의 추억담을 글로 옮겨간다.
7
병원 검사 결과, ‘나’는 황반 변성으로 오른쪽 눈의 시력 상실을 앞두고 있음을 듣게 된다. 이 외에도 온 몸의 예후는 좋은 것이 하나도 없다. 병원을 나설 때, 사람들의 시선을 느끼며 얼른 자리를 뜨고 싶어 하는 ‘나’에게 어머니는 씩씩하고 당당하라고 말한다.
8
그날 저녁, ‘나’는 늘 그랬던 것처럼 간단한 심부름(콩나물 사오기) 후 어머니 아버지와 저녁을 먹고 방으로 와 글쓰기에 속도를 냈다. 오래 전 어머니와 아버지의 이야기를 써서 열여덟 번째 생길에 부모님께 선물로 드릴 계획이기 때문이다.
그해 겨울, 아버지의 스포츠용품점이 문을 닫는다. 아버지의 허술한 사업수완 그리고 전국적인 경기불황 때문이었다. 외할아버지는 풍으로 쓰러지신다. 외할아버지는 ‘나’처럼 ‘어어’ 소리밖에 내지 못하시고 아버지만 보면 노여운 살의를 비치셨다.
하루는 글쓰기를 하느라 한껏 진이 빠진 ‘나’가 물을 마시러 부엌으로 가다 안방문 사이로 들리는 부모님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사채를 생각하다 이내 단념하고, 수미네에게 한 통에 천 원인 <이웃에게 희망을> ARS를 신청해 볼지 망설인다. 이윽고,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자책하는 것을 엿듣게 된다. 아기가 떨어지기를 바라며 열 바퀴, 스무 바퀴, 심창이 터지도록 밤새 운동장을 뛰었던 일에 대한 자책을. ‘나’는 소리 없이 방으로 돌아와 벽에 기대어 땀과 눈물 속에 컴퓨터 모니터 불빛을 왼쪽 눈으로 한 번, 오른쪽 눈으로 한 번, 그리고 또 왼쪽 눈으로 한 번, … 보다가 지난 몇 달 간 자신에게 설렘과 긍지, 기쁨을 주던 원고를 마우스 오른쪽 버튼으로 클릭해 삭제 창을 띄운다. 한참을 망설이고 주저하다, 삭제한다.
9
하루는 ‘나’가 자신이 좋아하는 빙수를 부모님께 사달라고 조른다. 가족이 다 함께 둘러앉아 빙수를 먹을 때,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나’는 <이웃에게 희망을>에 출연하겠다고 먼저 이야기를 한다. 만류하는 부모님께 고집을 피우며 너스레를 떨던 찰나, 손가락에 일순 힘이 풀린 ‘나’는 숟가락을 놓치고 정적에 휩싸인다.
[2부]
1
<이웃에게 희망을> PD는 한수미의 남편 채승찬이다. 그는 대호관광단지 설립 무렵 서울에서 전학 온 아이들 중 한 명으로, 한수미의 전교 1등 자리를 처음으로 빼앗았던 학생이었다. 동시에 어머니를 좋아해 ‘홀로서기’ 시집과 ‘빈 소년 합창단’ 테이프를 연애편지와 함께 어머니에게 건네기도 했던 남학생이었다. 당시 어머니도 채승찬에게 마음이 있었으나, 그의 아파트 단지를 찾았을 때 그가 주위 시선을 의식하며 난처해하는 모습을 보고 이후로 잘 되지 않았다.
‘나’의 가족은 촬영 사전 팀을 집으로 맞이해 미팅을 한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이런저런 질문에 답하고, 이윽고 ‘나’의 차례가 된다. ‘나’는 꼭 방송이 잘 되게 하겠다는 마음을 내심 품으며 인터뷰에 열심히 응한다. “꼭 해보고 싶은 게 뭐야?”라는 질문에 “(물에 잠겨 지금은 없어진) 부모님이 처음 만난 장소에 가 보는 것.”이라고 답하는 것을 끝으로 사전 미팅이 끝난다.
2
‘나’가 일곱 살이고 아버지가 스물네 살일 적, 아버지와 병원을 다녀올 때면 아버지는 늘 ‘나’를 데리고 오락실에 갔다. 게임을 좋아하지도, 오락실을 그다지 편안해하지도 않았지만 늘 데리고 갔다. 매번 들러 등받이도 없는 불편한 의자에 앉아 한 시간씩 오락에 몰두했다. ‘나’는 주로 아버지 옆에 죽치고 앉아 몸을 배배 꼬거나 동전 심부름을 했고, 지루해 골이 날 때면 아버지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그때마다 ‘나’의 주머니에 오백원이고 천원이고 용돈을 찔러주던 아버지의 옆모습은 손가락질 하나는 현란했지만 눈빛에 생기가 보이지 않았다.
이때 외에 아버지가 곁에 있어도 먼 곳에 있었던 느낌을 받았던 것은 딱 한 번, 어머니가 일주일 동안 집을 나갔을 때였다. 몇 달 전 내가 다시 중환자실에서 사경을 헤맬 때, 어머니가 먼저 가출했던 얘길 꺼내며 거듭 ‘나’에게 사과를 하고, ‘나’는 “누군가가 다른 사람을 사랑할 때, 그 사랑을 알아보는 기준이 있어요. 그건 그 사람이 도망치려 한다는 거예요.”라며 “엄마, 나는…… 엄마가 나한테서 도망치려 했다는 걸 알아서, 그 사랑이 진짜인 걸 알아요.”라고 어머니를 위로해준다.
다시 십년 전, ‘나’가 일곱 살이고 아버지가 스물네 살일 적, 평소처럼 병원을 들렀다 집으로 돌아가는 두 사람의 눈에 ‘방방이(=트램펄린)’가 눈에 들어온다. 가정에 달을 맞아 병원에서 설치해 각종 놀이기구를 설치해 둔 것이었다. ‘나’ 트램펄린 위에서 하늘로 오르내릴 때마다 까르르까르르 청명하게 웃어대는 아이들의 모습을 멍하니 쳐다 본다.
먼저 말을 꺼낸 건 아버지였다.
“아름아, 우리도 저거 할까?”
나는 삼초쯤 고민하다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그리고 점프─
한번 더 점프─
아, 나는 지금도 그 느낌을 잊을 수 없다. 퉁─하고 내가 튀어오르면 퉁─하고 아버지가 뛰어오르고, 다시 퉁─하고 아버지가 날아오르면, 퉁─하고 내가 따라 오르던 봄날의 호흡, 만일 인생의 가장 환한 장면이란 게 따로 있다면, 바로 그런 순간이지 않을까? 시원하고 개운한 바람, 펄떡이는 심장, 발밑의 탄력, 넘어지며 웃고, 웃으면서 자빠지던 우리의 활력. 기구 주위로 아이들이 동그렇게 모여 입을 벌린 채 우리를 올려다봤다. 나는 아무래도 좋았다. 아버지와 나는 그날 참으로 오랜만에 얼굴이 벌게져라 크게 웃었다. 그리고 그날은, 아버지가 그해 들어 처음으로 오락실에 들르지 않고 곧장 집으로 향한 날이었다.
그리하여 지금도 내가 반복해서 꾸는 꿈은 이거다. 나이를 먹지 않은 내가, 그때로 돌아가 아버지와 텀블링을 하는 것. 그 위에서 춤을 추고 노래하는 것. 그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바뀌며 여러가지 변주를 만들어 낸다. 이를테면 퉁─하고 내가 뛰어오른 뒤 아버지가 돼 내려오고, 퉁─하고 아버지가 날아오른 뒤 내가 되어 내려오는 것. 혹은 이럴 때도 있다. 내가 한 번씩 점프할 때마다 점점 젊어지는 것. 팔십이었다가 육십이었다가 열일곱이 되는 것.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진짜 내 나이가 되는 것. 그래서 한번도 보지 못한 내 얼굴을 보는 것. 하지만 꿈속 그림은 너무 아스라해, 나는 내 얼굴을 자세히 살펴볼 수 없다. 만져보고, 확인하고 싶은데, 꿈속 카메라가 점점 뒤로 멀어져 원경으로 빠진다. 하지만 나는 내가 젊어졌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알자마자 잠에서 깬다.
3
<이웃에게 희망을> 촬영 당일이 된다. 촬영팀은 집, 병원, 놀이터를 배경으로 어머니, 아버지, '나'의 모습을 촬영하며 인터뷰를 진행한다. 어머니는 작가의 요청에 '나'에 관한 일화들(어떤 것은 '나'도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을 소개한다. 아버지는 "말한다고 사람들이 알 것 같아요?"라며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여 촬영팀과 신경전을 벌인다. 하지만 "그래도 정 불편하시다면…… 지금이라도 촬영을 접겠습니다."라는 채승찬 PD의 말에 진지한 태도로 촬영에 임하게 되고, '나'가 아프다는 걸 처음 알게 된 날 추어탕 집에서 청각장애 부부가 갓난아기 자녀에게 연거푸 컵을 굴리는 것을 지켜봤던 기억을 꺼내 담담하게 말한다. 중간에 장씨 아저씨가 난입을 하지만 작가 누나가 잘 대처하고, '나' 역시 인터뷰를 열심히 하여 촬영은 잘 마무리된다.
4
<이웃에게 희망을> 방영일, '나'의 가족은 TV 앞에 모인다. 노련하고, 담백하며, 적절하게 잘 편집된 영상을 합께 집중해서 시청한다. (3에서 서술되지 않은 촬영 내용들이 제시됨.)
5
<이웃에게 희망을>을 통해 모인 성금은 생각한 것 이상이어서, '나'는 병원에 머물며 치료를 받을 수 있게 된다. 어머니도 식당일을 관두고 간호에 집중할 수 있게 된다. '나'는 병원에서 노트북을 하거나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낸다. 독서 경험을 아버지, 어머니, 간호사와 나누기도 한다. 노트북으로 시청자 게시판을 들어가 본 '나'는 "대단하다. 나라면 자살했을 텐데…… ㅋㅋㅋ"부터 각종 응원, 감동, 감사, 격려의 메시지까지 여러 글을 접하며 먹먹한 감정을 느낀다. 그로부터 이틀 뒤 '나'는 한 통의 메일을 받는다.
그애의 편지가 도착한 건 이틀 뒤였다. 메일 제목은 'Antifreeze'. 그래서 나는 처음에 그게 스팸메일인 줄 알았다. 그런데 혹시나 하고 열어본 페이지에, 그 아이가 있었다. 발신시간은 하루 전, 자정께로 표기돼 있었다.
아름에게
안녕? 나는 이서하라고 해. 열일곱. 너랑 같은 나이야.
그리고 나도 너처럼 머리카락이 없지. 그렇게 된 지 한참 됐어.
엊그제 '이웃에게 희망을'을 보고 편지를 써.
네 주소는 방송국을 통해 알았어. 혹시 기분이 나빴다면 미안해.
제작진이 처음엔 안 가르쳐주려고 하는 걸, 설득해서 받아냈어.
아마 나도 아픈 아이라는 걸 알고 알려준 것 같아.
네게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전해주고픈 말이 있어서야.
그날, 너는 네가 완전한 노인도 완전한 아이도 아니라 힘들다고 했지?
너무 빨리 먹은 시간들이 네 속에 가득 구겨져 있다고.
네가 작가 언니를 향해 '그래도 제가 더 오래 살았을걸요?라고 말했을 때 웃었어.
너만큼은 아니어도, 일분이 영원처럼 느껴지는 시간들에 대해, 나도 조금은 알고 있거든.
그리고 괜찮다면, 네 속 시간들에 대해 내가 다른 이름을 붙여주고 싶었어.
처음으로 떠오른 단어는 한라산!
음, 뭐 백두산도 괜찮고 그냥 높은 산이면 돼.
예전에 지리시간에 그런 얘길 들었거든.
그 산들은 너무 높아서, 고도별로 다른 꽃이 핀다고.
같은 시간, 한공간 안에서는 절대 살 수 없는 식물들이 공존한다고 말이야.
그곳에는 사계가 함께 있어, 여름에도 겨울이 있고, 가을에도 봄이 있대. 무슨 비유나 상징이 아니라 실제로 말이야.
그래서 내 멋대로 그렇게 정했어.
남들은 너를 '조로'라고 부르지만, 나는 그냥 너를 '산'이라고 부르겠다고.
아, 그리고 음악 하나.
맞아, 선물.
…… 행운을 빌어.
'나'는 첨부된 음원 'Antifreez, 검정치마'를 듣고, 메일 본문을 한 구절 한 구절 곱씹어 보며 여러 가지 생각에 잠긴다.('같은 나이야, 같은 나이야…… 봄이 있대, 봄이 있대……', '그나저나 이 아이는 어쩌다 이런 조숙한 시선을 갖게 된 걸까?', '아팠으니까.', '그런데 무슨 병을 앓고 있는 걸까? 머리카락이 없다는 걸로 봐서 가벼운 병은 아닐 것 같은데……')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이 아이를 좋아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예감 때문에) '나'는 답장을 보내지 않는다. 잊어버리려고도 해 보지만, 쉽게 마음을 떨쳐낼 수 없다. 그리고 그날 밤 '나'는 늘 꾸던 트램펄린 꿈을 꾸는데, 꿈속 장면에서 배경음악처럼 음원이 재생되고 '나'는 꿈속에서 음원의 가사를 힘껏 따라 부른다.
[3부]
1
'나'는 가을을 탄다. 풍향계가 움직이기 시작한다는 2계급 남실바람을 느끼며. 자판기 커피를 뽑아 벤치에 머물기도 하고, 허공에 입김을 불어보기도 한다. 간호사에게 농담을 던지는 레지던트의 모습을 보며 새삼 추파라는 단어가 예쁘다는 생각도 한다.
[교과서 20쪽 ~ 22쪽 중략 앞]
2
'나'는 천진난만한 면모가 있는 장씨 할아버지와의 일화(그동안 나눈 대화)들을 떠올린다. 그리고 사랑에 빠진 자신의 상태를 장씨 할아버지에게 털어놓고 명쾌하면서도 깨달음을 주는 답을 듣는다. 이후 술을 사달라고 했다가 단호하게 거절당한다.
3
'나'는 드디어 이서하에게 답장을 부친다. 일주일이 지나도록 답장이 오지 않자 몹시 낙담한다. 마음을 추스르고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을 무렵, 답장이 온다. 답장을 읽은 '나'는 설렘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끼며 무언가의 시작을 예감한다. 이후 편지를 주고받으며 '나'는 가슴 뛰는 나날을 보낸다. 하루는 아버지가 시청자가 보내 온 선물인 PSP를 '나'에게 보여주는데, '나'는 이서하와 편지를 주고받는 생각에 빠져 있어 심드렁해하고 포장도 뜯어보지 않는다.
4
하루는 채승찬PD와 한수미가 병문안을 온다. 한수미는 어머니와 이야기꽃을 피우러 병실을 나서고, '나'는 채승찬 PD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눈다. 그리고 이서하에게 메일주소를 알려주어 고맙다는 말을 전한다. 채승찬 PD는 자신은 그런 적이 없는데 아마 작가가 알려줬나보다라며 반응하고, 이서하가 아픈 애라는 '나'의 말에 눈이 번쩍이다가 사물함 아래에 있는 종이상자(PSP)로 화제를 돌리며 대화를 마무리한다. 혼자 남은 병실에서 '나'는 PSP를 꺼내 침침한 눈으로 게임을 실행해 본다. 게임이름은 '리틀 빅 플래닛'. 조작에 따라 캐릭터 '리빅'이 움직이자 '나'는 묘한 느낌을 받는다.
5
'나'와 이서하는 편지를 계속 주고 받고, 음악도 공유하며 인연을 이어간다. '나'는 이서하에 관하여 아는 게 많아질수록 궁금한 게 더 늘어난다. 하지만 부담을 주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앞선다. 그럼에도 단 한 가지 바람, 서하의 얼굴을 보고 싶다는 바람은 도저히 억누를 수 없어 편지를 쓴다. 눈 멀기 전에 봐둬야 할 것들을 봐 두자는 생각으로 주위의 풍경과 사물들을 늘 마지막인 것처럼 보며 지내고 있으며, 네 사진을 받아보고 싶다는 내용의 편지였다. 이후 며칠째 답장은 오지 않고, '나'는 두 차례 사과 편지를 보내지만 여전히 아무런 소식도 오지 않는다. 기다림에 지쳐 '나'가 거의 탈진할 무렵, 답장이 온다. 큰 수술을 받느라 답장이 늦었다는 얘기와 함께, 작고 귀여운 손을 클로즈업한 사진을 첨부한 편지였다. '나'는 모니터 위로 자신의 손을 갖다대어 사진 속 손에 포개어 본다.
6
다시 두 사람은 편지를 주고 받게 되고, 이서하의 꿈이 작가라는 것을 알게 된 '나'는 자신도 소설 비슷한 것을 쓰고 있다고 답해버린다. 이서하가 이 내용에 아주 진지하게 반응하며 거듭 이야기를 꺼내는 바람에 '나'는 컴퓨터를 샅샅이 뒤져 혹시나 지난 번에 지웠던 파일이 남아 있는지 확인해본다. 하지만 파일이 없음을 깨닫고 낙담하고, 울며 겨자 먹기로 다시 새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글 잘 쓰는 사람이 제일 멋지다는데, 어쩔 수 없었다.'라며.
7
노트북이 망가지거나 하는 것이 걱정되어, 새로 쓰는 소설은 그때그때 '내게 쓰기' 기능으로 메일함에 차곡차곡 저장한다. 그리고 뜻밖에도 소설을 쓰는 과정에서 자신이 이서하나 부모님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를 위해 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렇게 한창 소설을 써 가며 이서하와 편지를 주고받던 무렵, 채승찬 PD로부터 전화(병실 냉장고 위에 있는 공용전화)가 걸려온다. 아침 어머니가 없을 때 전화를 받은 '나'는 채승찬 PD로부터 이서하와 '나'의 사연을 방송에서 소개하고 싶은데 이서하의 메일 주소를 알려줄 수 있느냐는 요청을 받는다. '나'는 이서하를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채승찬 PD의 말이 귓가에 멤돌아 메일 주소를 알려준다. 그러고 나서 평소와는 다른 느낌의 편지가 서하로부터 온다. "너는…… 언제 살고 싶니?"라는 서하의 질문에 '나'는 정성을 쏟아 답장을 한다. 그리고 서하와의 연락은 뚝 끊기고 만다.
나는 혹시 그애가 승찬 아저씨의 연락을 받고 내게서 완전히 떠나버린 것은 아닐까 걱정됐다. 혹은 그애에게 절대 일어나선 안되는 일이 생긴 것은 아닌지 불안했다. 그사이 내 속이 얼마나 까많게 타들어갔는지, 내가 얼마나 깊은 슬픔에 빠져 살았는지, 그런 것은 얘기하지 않겠다. 어쩌면 내개 '언제 살고 싶어지느냐' 같은 이상한 질문을 던졌을 때 미리 알아차렸어야 했는지도 몰랐다. 혹은 내게 손바닥 사진을 보내줬을 때, 혹은 그전에라도 알 수 있는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는지 몰랐다. 그걸 내가 안 본 건지 못 본 건지 모르겠다. 그 아이가 나를 어떻게 생각한 건지, 내 마음은 또 어디로 흘러간 건지 그런 것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얼마 뒤, 한 가지 분명하게 알게 된 사실이 있다. 나와 유일하게 비밀을 나눴던 아이, 태어나 처음으로 나를 설레게 한 아이, 나의 진짜 여름, 나의 초록, 나의 첫사랑, 혹은 마지막 사랑이었던 그 아이가, 실은 열일곱살 소녀가 아니라 남자였다는 것을, 그것도 서른여섯살이나 된 아저씨였다는 것을 말이다.
[4부]
1
이서하와 연락이 되지 않아 힘들어하던 '나'에게 채승찬PD가 찾아와 "그 아이를 만나봤는데, 지금 많이 아파" "어쩌면 다시 네게 연락을 못할지도 몰라. 지금 스스로와 힘든 싸움을 하고 있대. 그애 엄마 말로는…… 가족들이 기도하고 있다더라. 그리고 서하가 이번 일을 잘 이겨내면, 함께 외국에 갈 계획이래."라고 소식을 전한다. '나'는 '그애 엄마'라는 말에서 채승찬PD의 이야기가 거짓임을 깨닫는다. 병실을 나선 채승찬PD를 뒤늦게 쫓아간 '나'는 어머니와 채승찬PD가 나누는 이야기를 엿듣게 된다. 이서하라는 인물이 사실은 불치병 소녀와 소년의 사랑을 다룬 시나리오를 궁리 중인 시나리오 작가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어머니는 파르르 떨며 언성을 높이고 울먹인다.
이후 '나'는 "누구세요?"라는 네 글자의 편지를 이서하에게 보내고, 답장은 받지 못한다. 그리고 책도, 노트북에도, 모든 것에 심드렁해진 채 '리틀 빅 플래닛'에 몰두하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의사 선생님은 시력과 면역력이 급격히 떨어졌다며 게임을 하지 말라고 이야기한다. 부모님은 게임기를 당장 뺏으려 하고, '나'는 다섯 살 아이처럼 떼를 부린다. 아버지가 단 하루만 게임을 할 수 있게 허락해주자 '나'는 그날 하루 내내 게임을 하고, 마침대 마지막 스테이지를 클리어한다. 복잡한 감정을 느끼며 '나'는 꺽꺽거리다 눈물을 터뜨리며 크게 운다.
2
'나'는 시력을 완전히 잃는다. 반복적인 하루가 계속된다. 어머니는 틈날 때마다 신문이나 책을 읽어주고 싶어했지만, '나'는 사양한다. '나'는 더 알고 싶은 것이 없었다. 병실에 주기적으로 새 환자가 들어오지만, '나'는 예전처럼 이것저것 물어보고 우스갯소리를 건네지 않는다. 금방 헤어질 사람과는 마음을 나누지 않는 편이 좋다고 생각하며, 오히려 그들이 내게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길 바란다. 어느 날은 늘 꾸던 트램펄린 꿈도 기괴하게 변주되어 꾸게 된다.
3
어느 날, 장씨 할아버지가 병실을 찾아온다. 여느 때처럼 장씨 할아버지와 쓸데없고 편안한 대화를 나누며 '나'는 눈물이 날 정도로 기뻐한다. 장씨 할아버지는 '나'와 함께 바깥바람을 쐬고 오겠다고 어머니에게 요청하고, 어머니가 만류하려 하자 '나'는 재빨리 "그럴래요, 나. 사실 그동안 하고 싶은 게 하나도 없었는데, 지금 막 그게 생겼어요. 엄마, 허락해주세요."라고 다급하게 말허리를 자른다. 장씨 할아버지는 휠체어를 끌며 담요를 덮어주고 목도리를 풀어 내 목에 감아준다. '나'는 장씨 할아버지와 함께 살아 있는 것들의 소리를 가만히 듣는다. 그리고 이전처럼 이런저런 대화(우문현답이 들어 있는)를 나눈다. "그때 그 꼬마 아가씨랑은 잘 됐니? 왜 너한테 편지 보냈다는 그 아이……"라는 질문에 가슴이 철렁하기도 했지만 잘 둘러댄다. 이어서 장씨 할아버지는 어느 날 현관 앞에서 주저앉아 울고 있는 '나'의 어머니를 보고 '나' 생각이 나서 이렇게 왔다는 이야기를 한다. 헤어지기 전, 장씨 아저씨는 마지막으로 점퍼 안주머니에 숨겨 온 팩소주를 꺼내어 '나'에게 쥐여준다. '나'는 팩소주를 조금씩 홀짝이며 장씨 할아버지와 찬 바람을 맞는다.
4
'나'는 하루하루 야위어간다. 아주 쉬운 단어도 잘 떠오르지 않아 머릿속을 한참 헤매야 하는 상태가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병실을 비운 사이 누군가의 기척이 들리고 "미안하다"는 남성의 목소리가 들린다. '나'는 그 남성이 서하임을 직감하고 서하를 만나면 하고 싶었던 말들을 쏟아내며 원망하고 미워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고마웠다는 말을 한다. 남성은 아무런 대답이 없다. 이윽고 어머니가 병실에 돌아와 "누구세요?"라고 묻자 남성은 "죄송합니다. 제가 병실을 잘못 찾았나봅니다."라고 대답하고 사라진다. 그날밤, '나'는 색이 많아 선명한 풍경의 꿈을 꾼다. 꿈속에서 감나무 가지에 손을 뻗어 홍시 하나를 따, 그 자리에서 덥석 베어물며 중얼거린다. "이상하다…… 꿈이 이렇게 생생하단." 그리고 다시 깨어났을 때, '나'는 중환자실에 있다.
5
이제 '나'는 하루에 단 두 번, 가족에 한해 삼십분의 면회 시간만 누릴 수 있게 된다. 혼수상태에도 몇 차례 빠진다. 시간이 많지 않음을 느낀 '나'는 아버지에게 노트북을 열어 '내게 쓴 편지함'에 있는 파일을 프린트해 가져와줄 것을, 그리고 절대 먼저 읽어보지 말 것을 당부한다. 아버지는 출력하자마자 봉투에 담은 뒤 테이프로 밀봉까지 해옸다며 단단히 생색을 내며 가져온 원고를 건넨다. 그리고 발신자가 이서하인 편지를 옮겨적어 왔다며 읽어주고 '나'가 말하는대로 답장을 써내려가다, 운다.
같은 날, 새벽 무렵, 부모님은 면회시간이 아닌데로 의료진의 연락을 받고 '나'를 급히 찾아온다. '나'는 지금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중환자실에 도착한 부모님에게 선물이라며 베개 밑에 둔 원고를 가리킨다. 그리고 힘겹게 더듬더듬, 천천히 말을 이어간다.
실은 예전부터 쓴 게 하나 더 있었는데 바보같이 지워버렸다고, 그땐 엄마 아빠가 미워서 그랬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부족하지만 이게 당신들을 기쁘게 해줬으면 좋겠다고. 더 쓰고 싶은 얘기가 있었는데 그러지 못했다고. 괜찮다면 그 원고를 지금 내가 보는 앞에서 읽어달라고.
[교과서 22쪽 중략 뒤 ~ 24쪽]
[에필로그]
부모님의 모습이 보인다. 두 분은 내 머리맡에 앉아 이마를 맞댄 채 당신들의 이야기를 읽고 있다. 나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반응을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아, 두 분 숨소리와 기척에 집중한다. 그리고 이럴 때 두 사람의 표정을 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하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나를 내가 또 바라본다. 나는 내가 적은 첫 문장과 다음 문장을 떠올린다. 그러곤 지금 어머니와 아버지가 읽고 있는 부분이 어디쯤인지 가늠하고 따라가려 애쓴다. 가물가물 눈이 풀리고, 숨이 가쁘다. 아무래도 나는 두 분이 뭐라 하나 꼭 듣고 갈 모양이다. 바람이 부는 것은 나무들이 제일 잘 안다. 이 문단은 이미 건너가셨겠지. 바람이 부는 날에 짝짓기를 해야 한다는 건 아버지가 제일 잘 안다. 이 단락쯤 도착하셨겠구나. '나랑 해, 나랑 해'는 어떠실까. '나도 잘해, 나도 잘해'는 또 어떡하고. 행여 부끄러워하지는 않으실까. 여러가지 걱정이 되면서도 가슴이 뛰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나는 귀를 쫑긋 세운 채 두 분 숨소리를 경청한다. 이윽고 간헐적인 훌쩍임 사이로, 어디선가 '쿡'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그걸 놓치지 않고, 반색하며, 다급하게, 병상에서 벌떡 일어나기라도 할 기세로 묻는다.
"아빠."
"응?"
"어디예요?"
"뭐?"
"조금 전……"
아버지가 뭐라 대답하지만 이상하게 잘 들려오지 않는다. 모든 것이 아스라이 어렴풋해진다. 두 눈 위로 밀린 잠이 눈사태처럼 쏟아진다. 그리고 어디선가 찢어질 듯 매미 우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바람보다 키 큰 그물채를 잡고, 뱅글뱅글 어둠속을 날아다니는 문장들을 붙잡으려 애를 쓴다. 하지만 그것들은 몸이 날쌔 쉽게 걸려들지 않는다. 이윽고 그 말들은 스스로 노래하기 시작한다. 아버지, 내가 아버지를 낳아드릴게요. 어머니, 내가 어머니를 배어드릴게요. 나 때문에 잃어버린 청춘을 돌려드릴게요. 아버지, 내가. 어머니, 내가. 그런 뒤 물뱀처럼 허리를 꺾어 어디론가 재빠르게 달아난다. 앞으로 나는 어떻게 될까. 그리고 어디로 갈까. 그런 것은 모르겠다. 다만 조금 전 내가 던진 한마디, 어디예요? 그 한마디가 어쩌면 내가 지상에 남기고 가는 마지막 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그것. 아빠. 응? 어디예요. 뭐? 조금 전…… 어디에서 웃었어요? <끝>
※ 단행본에는 [에필로그] 뒤에 [두근두근 그 여름 - 한아름]이라는 제목으로 별도의 단편소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소설에서 '나'가 죽는 순간 부모님이 읽어내려가던 '원고'에 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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