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부분】
“돌고 돌아서 돈이라고? 돌고 도는 돈 본 놈 있음 나와 그래! 우리 같은 신세는 평생이 지랄로 끝장이야. 돈? 에이! 개수작 말라고 해.”
임씨가 갑자기 탁자를 내리쳤다. 그 바람에 기우뚱거리던 맥주병이 기어이 바닥으로 나뒹굴면서 요란한 소리를 내었다.
“참고 살다 보면 나중에는…….”
“모두 다 소용없는 일이야.”
임씨의 기세에 눌려 그는 또 말을 맺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나중에는 임씨 역시 맨션아파트에 살게 되고 달걀후라이쯤은 역겨워서, 곰국은 물배만 채우니 싫어서 갖은 음식 타박에 비오는 날에는 양주나 찔끔거리며 사는 인생이 될 것이다, 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천번만번 참는다고 해서 이 두터운 벽이, 오를 수 없는 저 꼭대기가 발밑으로 걸어와 주는 게 아님을 모르는 사람이 그 누구인가.
그는 임씨의 핏발 선 눈을 마주보는 못하였다. 엉터리 견적으로 주인 속이는 일꾼이라고 종일토록 의심하며 손해볼까 두려워 궁리를 거듭하던 꼴을 눈치채이지는 않았는지, 아무래도 술기운이 확 달아나 버리는 느낌이었다. 제아무리 탄탄해도 라면 가닥으로 유지되는 사내의 몸뚱이는 술 앞에서 이미 제기 운을 잃고 있음이 분명했다. 임씨의 몸이 자꾸만 한쪽으로 쏠리는 것을 보면서 그는 점차 술이 깨고 있었다.
“어떤 놈은 몇 억씩 챙겨 먹고 어떤 놈은 한 달 내내 뼈품을 팔아도 이십만원 벌이가 달랑달랑한테, 외제 자가용 타고 다니며 꺼덕거리는 놈, 룸싸롱에서 몇 십만원씩 팁 뿌리는 놈은 무슨 재주로 그리 사는 거야? 죽일 놈들. 죽여! 죽여!”
임씨의 입에 거품이 물렸다.
“비싼 술 잡숫고 왜 이런당가요, 참으시오. 임씨 아저씨. 쪼메 참으시요.”
김반장이 냉큼 달려들어 빈 술병과 잔들을 챙겨 갔다. 임씨는 탁자에 고개를 처박고서 연신 죽여, 를 되뇌우고 그는 속수무책으로 사내의 빛 바랜 얼굴만 쳐다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 '죽일 놈들'속에는 그 자신도 섞여 잇는 게 아니냐는, 어쩔 수 없는 괴리감이 사내의 어깨에 손을 대지 못하게 막고 있었다.
“겨울 돼 봐요. 마누라나 새끼나 왼통 검댕칠이지. 한 장이라도 더 나르려니까 애새끼까지 끌고나오게 된단 말요. 형씨, 내가 이런 사람입니다. 처자식들 얼굴에 검댕칠 묻혀 놓는, 그런 못난 놈이라 이말입니다…….”
임씨의 등등하던 입술도 마침내 술에 젖는 모양이었다. 말이 제대로 입밖으로 빠져나오지 못하니까 임씨는 자꾸 입술을 쥐어뜯어었다.
“나 말이요. 이번에 비만 오면 가리봉동에 가서 말이요…….”
임씨가 허전한 눈길로 그를 쳐다보았다. 목소리도 한결 풀기 없이 쳐저 있다.
“그 자식이 돌만 주면…… 돈만 받으면, 그 돈 받아 가지고 고향으로 갈랍니다.”
“고향엘요.”
“예. 고향으로 갑니다. 내 고향으로…….”
공이 박힌 손가락으로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임씨는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에이, 이 아저씨는 술만 마셨다 하면 꼭 울고 끝을 보더라. 버릇이라고요, 술버릇.”
가게 안에서 내다보고 있던 김반장이 임씨에게 머퉁이를 주었다. 그래도 임씨는 쫓겨난 아이처럼 울음을 그치지 않았고, 그는 오줌이라도 마렵다는 듯이 슬그머니 자리를 떠서 김반장에게 술값을 치렀다. 돈을 치르고 나니 진짜로 오줌이 마려워서 그는 형제 슈퍼 건너편의, 불빛이 닿지 않는 공터를 슬슬 걸어갔다. 그때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그를 스쳐 지나갔다. 으악. 으악. 손바닥을 탁 치면 기다렸다는 듯이 목을 뚫고 비명처럼, 혹은 탄식처럼 으악 소리가 튀어나왔다. 으악새 할아버지였다. 노인은 그가 일을 다 볼 때까지도 공터 주변을 어슬렁거리면서 연신 괴로운 소리를 뱉어내었다. 으악 으악.
옷을 추스르며 뒤돌아보니 백열전구 불빛 아래 혼자 동그마니 앉은 임씨가 아직껏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취한 몸을 가누지 못하고 있었다. 이름은 모르지만 낯익은 동네 사람들이 형제슈퍼를 향해 줄달음쳐 오다가는 그런 임씨를 발견하고 홀낏홀낏 훔쳐보며 가게로 들어갔다.
밤도 꽤 깊었으리라. 광복절 공휴일도 이제 마감이었다. 가슴이 답답했다. 남은 일은 집으로 돌아가서 나무토막처럼 쓰러져 꿈 없는 잠을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하늘엔 별이 총총하고 아마도 내일은 비가 오지 않을 것이었다. 어둠 속을 서성이던 으악새 할아버지도 하늘을 올려다보았는지 손뼉을 탁 치면서 으악, 짧게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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